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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30


short novel. 바람이 마음을 바꿀수있을까. 글 서진(소설가)

흘깃 거리며 옆자리에 앉아 있는 아버지를 쳐다본다. 꾸벅 꾸벅 졸다가 깨어나서는 차창 밖을 바라보고 계신다. 뒷자리에 앉아 있는 어머니의 눈가는 젖어 있다. 요즘, 어머니는 눈물이 마를 리가 없다. 제주 공항에서 출발할 때는 날씨가 흐렸지만 동쪽 해안으로 갈수록 구름이 옅어진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왜 자꾸 묻냐?” 평소처럼 퉁명스럽게 대답하시는 걸 보니 정말 아프시지 않은 것 같은데... 그놈의 암세포는 아버지의 배속에서 꽁꽁 숨어 10여년을 지내왔단다. 대장암은 내시경으로 검사하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들다고 한다. 그나마 종합검진을 받지 않으셨다면 놓쳤을 것이다. 의사는 3기가 넘었다고 수술과 항암치료를 권했다. 처음에 아버지는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걸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바닷가 풍경이 참 좋지요? 이런 곳에서 오래 오래 사시면 되잖아요.” 아버지는 늘 공기 좋은 곳에 가서 농사나 지으며 살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는 늙어서 고생하기 싫다며 혼자 가라고 못마땅해 하셨다. 하지만 이제 그런 소박한 바람도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아버지는 수술과 항암치료를 모두 거부하셨다. 살 만큼 살았고, 병원에서 고통 받으면서 남은 생을 살기 싫단다. 처음에는 그냥 하는 말씀이려니 했는데 정말 병원에 발길을 뚝 끊으셨다고 하소연하는 전화를 어머니께 받았다. 아버지의 고집을 알기 때문에, 나도 그 성격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말로 설득을 하는 것은 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제주도 여행을 제안한 것이다. 부모님은 10년 전에 부부 동반 모임으로 제주도를 처음 여행하셨단다. 나도 5년 전에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왔었다. 아버지는 여행은 돈낭비라는 철학을 가지고 계셔서 그 이후로 다시 제주도를 여행한 적은 없으시다. 혹시 바람이라도 쐬면 아버지의 마음이 달라질 수 있을까 기대했다.

김녕 해수욕장을 지나 해안 도로로 접어들었다. 시간이 넉넉하니까 풍경 좋은 곳으로 드라이브를 해도 된다. 바쁘게 살다보니 늘 빠른 길을 가려고만 하지 풍경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 갑자기 죽을 지도 모르는데. “아버지 덕택에 저도 오랜만에 푸른 하늘과 바다도 보네요.” “저게 뭐냐?” 아버지는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하얀 봉이 솟아올라 있고 꼭대기에 뱅글 뱅글 날개가 돌고 있었다. 맞다, 신혼여행 때 이곳에서 찍은 사진이 있다. “풍력 발전기에요. 제주도에는 바람이 많잖아요.” “어머, 우리는 예전에 못 봤는데. 사진이라도 찍자.” 어머니가 채근하셔서 근처에 차를 세웠다. 풍력 발전기와 부모님을 다 담으려고 하니 구도가 잘 나오지 않았다. 바람이 세게 불어서 어머니의 머리카락은 날리고 아버지는 중절모를 한 손으로 꼭 쥐고 있다. 두 분 뒤로는 풍력 발전기가 빙글 빙글 돌고 있고. 찰칵, 다시 한 번 찰칵 찰칵. 사진을 찍다 살짝, 눈물이 나올 뻔 했다. 어쩌면 이 사진이 두 분이 건강하실 때 찍은 마지막 사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차 안에서 아버지는 웬일인지 뒷자리에 어머니와 함께 앉아 있다. 어린 아이들처럼 휴대폰에 찍힌 사진을 확인하고 계신다. “운전 조심해 이놈아, 너 때문에 황천길 일찍 가기 싫으니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예감이 좋다. 어쩌면 바람이 아버지의 마음을 바꿀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