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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30

지난호보기

숨은 보석찾기

이순명 연구원, 오디오로 숨어있던 감각을 일깨우다

연구원의 오르막길을 올라서면 유독 볕이 좋은 공간이 나타난다.
햇살을 받으며 태양열집열기와 제로에너지 솔라하우스가 서있고, 그 옆으로 실험기기를 점검하고 있는 이순명 연구원이 보인다.
일에 집중하던 그가 잠시 틈을 내어 제로에너지 솔라하우스 안으로 들어간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어서인지 유난히 조용하다. 흔적이 없다.
이층으로 나 있는 계단을 올라가 작은 방의 문을 열자, 벽 한쪽에 그가 직접 설치해놓은 오디오가 보인다.
곧, 아무 말 없이 음악을 틀고 스피커 앞에 앉아 눈을 감는다. 비어있던 공간이 음으로 채워진다.
보이지는 않지만, 음의 흔적들이 공간을, 그를 덥혀준다.

릴테이프 녹음기에서 위안을 받다

그가 열일곱 때, 형은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이 이유였다.
어느 날, 영어회화 공부를 하겠다며 형이 일제 아이와 릴테이프 녹음기를 하나 사왔다. 녹음기 안에는 샘플 테이프가 들어있었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이름 모를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는 듣고, 또 들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오디오시스템이 있는 선배들의 집을 찾아다녔다.
음악을 릴테이프에 녹음해 와서는 형과 그 앞에 오랫동안 앉아 있곤 했다.
대학에 갈 꿈도 꿀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을 시절, 밤에 자리에 누워 뒤척일 때면 호세 펠리치아노의 레인(rain), 킹 크림슨의 에피타프(Epitaph)가 그의 가라앉은 가슴을 두드렸다.
“사춘기 때라 그런지 소리가 주는 위안과 감동이 컸습니다. 열아홉 살 때는 청계천 시장을 하루종일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스피커를 구해와 직접 조립하기도 했죠.” 그 때부터 쭉 인생의 순간마다 오디오가 곁에 있었다.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어느새 수십 년의 시간을 넘어 머리칼 희끗한 어른이 되었다.
음악 취향이 클래식으로 바뀌고, 등산이나 테니스 같은 다양한 취미가 생기고, 실컷 즐긴 만큼 오디오에 대한 관심이 이전처럼 크지는 않다.
그럼에도 힘들었던 시절 받았던 위안, 오디오로 인해 느꼈던 소리의 신비로움, 감각의 확장은 여전히 그 안에 남아있다..

신비로운 생물과도 같은 오디오

오디오는 I hear ‘나는 듣는다’라는 라틴어에 뿌리를 둔다. 그것은 음악이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이기도 하고, 바람 소리이기도 하다.
그는 길을 가다가 새소리를 들으면 반갑다. 산 속 물 흐르는 소리가 갑자기 성큼 성큼 다가올 때도 있다.
그 소리 속에는 어떤 날의 기억이나 그리움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오디오는 소리를 담아두었다가 재생해주죠. 소리로 인해 또 다른 공간과 시간, 정서 속으로 갈 수 있다는 것. 오디오가 줄 수 있는 크나큰 매력이고 축복입니다.” 그렇기에 그에게 오디오는 한낱 기계 장치가 아니다. 생물과도 같다.
비싸다고 해서 꼭 좋은 소리를 들려주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오디오 자체를 즐기기보다 보여주기 위해 욕심을 부린다면 비싼 소리만 들을 수 있을 뿐, 마음에 남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음향이론에 대해 공부하고, 자기 몸을 써서 기기배치를 하고, 애지중지 아껴준다면 오디오는 분명 좋은 소리를 들려줍니다.
” 마치 여러번의 시도와 실험 끝에 자신만의 연구와 삶의 방식을 찾아내는 것처럼 그는 자신만의 소리를 찾아낸다.
신혼시절, 아무도 안 가져갈만큼 낡은 턴테이블에 좋은 바늘을 사서 붙여보았다가 생각지 못했던 소리를 선물로 만난 것처럼.
그리고, 지금도 텔레비전에서 들었던 노래를 오디오로 들을 때 놀라곤 한다. 전혀 다른 소리가 귀를 열어주기에.

어느 밤, 그는 동료와 함께 미션 사운드트랙을 틀어놓고, 오디오 스피커 앞에 앉았다.
그의 눈 앞에 폭포수가 나타났다. 빼곡한 숲이 그들을 둘러쌌다.
곧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눈 앞에 서 있고, 바이올린 연주자가 그의 귀에 대고 현을 울려댄다.
분명 귀를 열어두고 있을 뿐이었는데 어느새 소리가 한 장면으로 바뀌어있다. 놀라운 감각의 확장.

“감각이 주는 즐거움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오디오 뿐만이 아니에요. 조금만 지평을 넓혀보면 도처에서 새로운 것을 만나게 될겁니다.”
이순명 연구원이 오디오라는 생물을 통해 결국 하고 싶었던 이야기.
오디오도 좋고, 다른 무엇이어도 좋다. 무디어진 눈과 귀, 코, 그리고 살갗을 톡톡 깨울 수 있기를.
생을 움직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