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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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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먹고사는 새로운 생물체 아니마리스

생명을 가진 채 환경에서 에너지를 얻어 성장하고 번식하는 개체를 생물 또는 생명체 라 부른다. 동물, 식물, 미생물 등 다양한 종류의 생명체들은 적응과 진화를 거듭하며 거대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1990년 네덜란드의 바닷가에 새로운 개념의 생명체가 등장했다. 거북이 같기도 하고 게와 닮기도 한 이 생물의 이름은 아니마리스 불가리스(Animaris vulgaris), 우리말로는 평범한 해변동물 이다.

자연의 에너지만을 이용해 움직이고 진화하는 생명체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플라스틱 관을 테이프로 덕지덕지 이어 붙여 뼈대를 이루었다. 등에 달린 깃털이 바람에 흔들리면 그 에너지를 받아 16개의 다리가 움직였다. 물론 이 생명체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진짜 생물이 아니다. 네덜란드 예술가 테오 얀센(Theo Jansen)의 손에서 탄생한 인공 기계장치다. 괴상하고 낯선 모습 때문에 ‘해변의 괴물(Strandbeest)’이라 불리기도 한다.

아니마리스는 인공의 힘이 아닌 자연의 에너지만을 이용해 움직이고 진화하고 번식한다는 점에서 생물체라 불릴 이유가 충분하다. 뼈대 안에는 압축 튜브와 플라스틱 물통이 내장되어 있어 바람이 잦아들 때도 미리 비축한 에너지를 사용해 자유롭게 움직인다. 장애물을 만나면 비켜 가기도 하고 스스로의 판단 하에 이동 방향을 결정하기도 한다.

지난 20년 동안 진화도 거듭되었다. 재료와 기능에 따라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최초의 아니마리스는 접착테이프를 이용해 제작하는 글루톤(끈끈이 생물) 기에 탄생했다. 이후 끈을 이용한 코르다(끈 생물) 기, 스스로 방향을 바꾸는 칼리둠(영리한 생물) 기, 나무로 만들어진 리그나툼(통나무 생물) 기, 압축공기를 응용한 바포룸(공기 생물) 기를 지나 최근에는 뇌를 이용해 판단을 내리는 케레브룸(뇌 생물) 기에 도달했다.

각 시기마다 다양한 생물체들이 선을 보였다. 바람으로 걷는 ‘아니마리스 쿠렌스 벤토사(Animaris currens ventosa)’, 벌레처럼 생긴 ‘아니마리스 베르미쿨루스(Animaris vermiculus)’, 나무 몸체에 코뿔소를 닮은 ‘아니마리스 리노케로스(Animaris rhinoceros)’, 장애물을 감지하는‘아니마리스 페르키피에레(Animaris percipiere)’, 방향을 바꿀 줄 아는 ‘아니마리스 구베르나레(Animaris gubernare)’, 고무튜브를 유전자로 삼는 ‘아니마리스 게네티쿠스(Animaris geneticus)’ 등 실제 생물처럼 라틴어 학명을 가진 인공 생명체가 속속 나타났다.

예술과 공학 간의 장벽은 우리 마음속에만 존재한다

바람 부는 해안가에서 수많은 다리를 움직이며 매끄럽게 움직이는 모습은 신기함을 넘어 경외감까지 불러일으킨다. 처음에는 괴상한 생김새에 스스로 움직인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지만, 바람이라는 친환경 에너지만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조명을 받고 있다. 화석연료나 전기모터를 사용해야만 동력을 얻어낼 수 있다는 인류의 고정관념을 깬 것이다.

아니마리스 제작으로 생물과 에너지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 얀센은 네덜란드 델프트 공과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이후 기계제작자, 컴퓨터공학자, 생물학자로 활동 영역을 넓혀왔다. 그 과정에서 예술적 창의성을 적극 발휘해 현재는 융합형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도 동서양 각국에서 강연과 전시 요청이 끊이지 않는다.

“예술과 공학 간의 장벽은 우리 마음속에만 존재한다”는 명언을 남긴 테오 얀센. 그의 바램대로 해변동물들이 스스로 번식하며 지구 곳곳을 누비는 날이 오면 인류가 에너지를 이용하는 방식도 지금과 다른 모습을 띠게 될까. 창의성과 융합 마인드로 미래를 바꿀 또 다른 테오 얀센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