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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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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상상의 세계를 그리다 - 라이트 아티스트(Light Artist) 허수빈

고요하게 검푸른 밤.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물끄러미 쳐다보니 푸른 창문 하나가 떠올라 있다. 미묘하게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고, 비를 뿌릴 듯 흐려지기도 하는 푸른빛을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창문 너머가 눈앞에 그려진다. 무수히도 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그 사이로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이가 서 있는 장면.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누군가가 부르는 노래에 귀 기울이고 있는 장면.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장면. 손을 뻗어 창문을 열면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모습에, 상상만으로도 마음 한 켠이 부드러워진다. 마치 어린 시절 달을 바라보며 상상의 유희를 펼치고 소원을 빌었던 그 밤들처럼. 이토록 잔잔한 빛으로 또 다른 세계를 열어주는 푸른 창문은 허수빈 작가가 만들어낸 ‘창문가로등’ 이다.

물감대신 LED로 만드는 아름다움

허수빈 작가는 빛을 재료로 오랫동안 작업해왔다. 2001년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신표현주의를 배우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떠났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물감과 붓을 내려놓는다. “유학가기 전에는 빛을 예술의 영역으로 다루는 분야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독일 교수님 중에 유일하게 빛작업을 하는 분이 계셨는데, 한 눈에 보고 반했죠. 평면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 속에서 빛을 가지고 노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었어요. 그때부터 물감 대신 빛을 재료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허수빈 작가가 반한 새로운 미술은 라이트 아트(light art)라 불리며 빛 자체를 표현의 도구로 사용한다. 그 중에서도 LED는 그에게 이상적인 재료이다.

빛을 이루고 있는 빨강, 녹색, 파랑 세가지색으로 못 만들 색은 없기 때문이다. 그는 2008년 11월 한 달 동안 매일 매일 미묘하게 다른 새벽 하늘빛을 LED로 만들어 기록하기도 했다.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 처음 국내에서 작업한 ‘창문가로등’ 역시 LED와 태양광을 활용한 작품이다. 가로등 끝에 LED 창문을 달고 그 뒷면에 태양전지를 부착해 만들었으며, 낮에 모아진 태양빛은 밤과 함께 푸른 창문으로 변한다. “푸른빛은 사람의 감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심리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고 해요.

여러번의 시도 끝에 가장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푸른빛을 만들어, 12분 동안 그 빛이 조금씩 변하도록 프로그래밍 했습니다.” 허수빈 작가가 만들어낸 푸른빛은 아무리 오랫동안 바라보아도 눈이 부시지가 않다. 그는 빛으로 오염되어 잠들지 못하는 밤에 평온함을 주고 싶었다고 한다. 창문가로등은 현재 부산 초량동, 부산 안창마을, 울산 태화강공원, 기장군 네 곳에 세워져 있다. 도시의 네온사인, 나무와 바위를 둘러싸는 경관조명 마냥 강하게 주장하는 것 없이 그저 담담하게 보는 이들을 감싸준다.

빛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지다

허수빈 작가가 하고 있는 작품들은 창문가로등과 마찬가지로 평온하면서도 꿈꾸는 분위기를 가진다. 작품의 구조는 간단명료하지만 그 너머로 세계가 확장된다. 최근 작업한 작품 ‘문’ 역시 그러하다. 벽 면에 부착된 판에 불이 켜지는 순간, 벽 너머로 걸어들어 갈 수 있을 것 같은 틈이 생긴다. 그리고 문 틈으로 나오는 빛을 바라보고 있으면, ‘지금 서 있는 이 세계만이 전부는 아니다, 괜찮다’며 토닥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문을 활짝 열면 빛이 와락 달려들 것도 같다.

그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지금까지의 작품을 살펴보면 그 속에 치유를 담아내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은 작품을 통해 저 스스로 먼저 치유를 받고 싶어서인지도 모르죠.”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를 대신에서 어루만져주고자 하는 마음이 그도 모르는 사이, 작품 속에 스며져 있다.

‘창을 그리다’ 시리즈도 그의 따뜻한 시선이 잘 담긴 작품이다. 캔버스에 축광안료를 층층히 발라 올려 만든 창문은 어두운 공간 속에서 잔잔히 빛을 발한다. 그가 오랜 시간을 들여 직접 만든 색이기에 어느 야광색지와는 빛의 발하기가 다르다. “반지하나 지하에 있는 방들은 창문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있다 하더라도 들어오는 빛은 아주 미세하죠. 그러한 공간에 비록 실제가 아니더라도 창문을 그려주고 싶었습니다.” 벽으로만 둘러싸인 방, 창이 있다 해도 빽빽하게 들어선 맞은 편 건물 때문에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방, 시계를 확인하지 않고는 아침이 온 지도 모르는 방. 그 어둠을 달래주는 작은 창문 하나, 지친 몸을 누이는 사람들의 머리맡에 하나씩 걸어두고 싶어진다.

풍력발전기로 만드는 거대한 빛 드로잉

최근 그는 허수빈 이라는 이름 외에도 엘 프로젝트(L-project) 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이다. 엘 프로젝트는 최수환 작가와 만든 라이트 아티스트 그룹으로, 빛을 이용한 공공 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사람이 자리에 앉으면 흰 색이 파란색으로 바뀌는 ‘빛 벤치’, 흘러나오는 음악에 따라 다양한 빛과 형태를 연출하는 ‘노래하는 계단’은 공원 내에 설치되어 시민들이 직접 빛의 이미지를 만들어 낼 예정이다. 또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미술과 과학을 결합한 미술교육을 진행해 상상력을 키워주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대전문화재단과 대전시립미술관이 주관한 아티언스 레지던스(Artience Residency)를 통해 또 하나의 도전에 나섰다. 아티언스(Artience)는 Art와 Science의 합성어로 과학기술과 예술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관점이 담긴 작업을 보여주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작가 4팀과 4명의 과학기술자들이 함께 했으며, 그 중 엘 프로젝트는 풍력발전기 프로펠러에 LED를 결합하여 빛 드로잉을 구현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바람이 불어 날개가 회전하면 프로그램밍에 의해 LED들이 여러 가지 빛을 내고, 그 빛이 우연의 선들로 연출이 돼 하늘에 거대한 빛의 드로잉을 만들어 내는 거죠. 아주 예전부터 풍력 발전기를 볼 때마다 꿈꾸던 그림이었어요.”

풍력발전기로 만드는 거대한 빛 드로잉

허수빈 작가는 이 작업을 위해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의 풍력발전 연구원을 만나 풍력발전기의 기초적인 구조와 원리, 설치상황, 전망, LED장착 시 문제점 등에 대해 조언을 듣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지금 당장 풍력발전기의 프로펠러에 LED를 부착하는 것은 날개의 균열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고심 끝에 엘프로젝트는, 우선 실험단계로서의 프로토타입을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김승훈 연구자과 협력하여 제작했다. 언젠가 그려질 빛드로잉을 위한 첫발걸음인 것이다. “이번의 경우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그러한 과정이 있었기에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빛드로잉을 넘어서서, 프로펠러 하나에 촘촘하게 LED를 박아 디지털 시계를 띄우는 것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허수빈 작가는 많은 제약이 있음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이 작업을 시도하겠다고 한다. 일 년 삼백육십오일 빛드로잉이 펼쳐지는 하늘과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풍경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말이다.

어렸을 적 꿈은 과학자, 발명가, 만화가, 화가

허수빈 작가의 스케치북은 아직 현실화되지 못했지만 반짝이는 상상력이 돋보이는 아이디어로 가득차있다. 이번 과학기술자와의 협업은 여러 가지 한계로 인해 아이디어로만 생각해왔던 작품들을 더 발전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으로 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 본 계기가 되었다. “항상 답답했습니다. 외국의 경우에는 예술가와 과학기술자, 그리고 연출자까지 협업이 잘 이루어져 있어서 부러워하곤 했죠.” 프랑스의 비주얼 시스템은 예술가, 작곡가, 건축가, 과학기술자 등이 모여 만든 그룹으로 빛을 중심에 두고 새로운 감각의 작품들을 선보인다고 한다. 공연 디렉팅은 물론, 옷에 붙일 수 있을 만큼 가볍고 구부리기 쉬운 LED소재개발까지 할 정도라니, 이는 다양한 영역의 전문가들이 만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렸을 적 꿈이 과학자, 발명가, 만화가, 화가였습니다. 상상력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다를 뿐이지 모두 비슷해요. 제가 겪어보니 효율만을 생각하는 과학자도 있는 반면에 예술가의 상상력을 존중하며 적극적으로 새로운 영역을 모색하는 과학자도 많습니다.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를 눈 앞에 보여줄 수 있도록 서로의 장점을 공유해나갔으면 좋겠어요.”

허수빈 작가가 빛으로 그리는 새로운 상상의 세계를 미리 부터 마음속에 그려본다. 지금까지 그의 작업이 그러했듯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저 너머를 꿈꿀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