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현대 전기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일 과학자 발터 네른스트는 백열전구의 한계를 넘어섰다. 당시 전구는 얇은 금속 필라멘트를 진공 유리구 안에 넣어야 했지만, 공기
중에서는 쉽게 산화되어 끊어졌다. 네른스트는 금속 대신 지르코늄 산화물(ZrO2)과 이트륨 산화물(Y2O3)로 만든 세라믹 막대를 발광체로
사용했다. 이 막대는 고온에서도 산화되지 않아 진공이나 비활성 기체가 필요 없었고, 공기 중에서도 안정적으로 빛을 냈다. 덕분에 네른스트 램프는 단순한
유리 덮개로 작동하며, 당시 전구보다 더 밝고 효율적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네른스트가 주목한 이 특성이
단순한 전구 개발을 넘어 전혀 다른 분야의 문을 연 열쇠가 됐다는 것이다. 1930년대 칼 바그너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고온에서 세라믹 막대에서 전기가 흐르는 이유가 산소 이온의 이동 때문임을 규명했다. 이는
세라믹을 단순한 전기 저항체나 발광체에서, 연료전지와 같은 전기화학 장치의 핵심 재료로서 새로운 길을
열었다. 결국 더 나은 전구를 만들려던 실험이 약 100년
뒤 수소경제의 핵심 기술로 이어진 셈이다.
실제로 이 성질은 곧 고체산화물 연료전지(SOFC) 개발로
이어졌다. SOFC는 세라믹 전해질을 통해 산소이온을 이동시켜 수소와 반응시키고, 이 과정에서 전기를 생산한다. 반대로 전기를 공급하면 물을 분해해
수소를 만드는 고체산화물 수전해(SOEC) 장치가 된다. 두
기술 모두 700도 이상의 고온에서 작동하며, 높은 효율과
빠른 반응 속도를 갖추어 귀금속 촉매가 필요 없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놀랍게도 이러한 발견 후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지르코늄 산화물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초기에 사용된 순수 지르코니아는 고온에서 깨지기 쉽고, 온도
변화에 따른 부피 변화가 심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스칸듐(Sc),
이트륨(Y) 같은 원소를 첨가한 안정화 지르코니아가 개발되었고, 이 과정에서 이온전도도와 기계적 강도가 모두 향상됐다. 이후 불순물
저감, 첨가 원소 최적화, 대면적 제조 기술 등이 발전하면서
연료전지와 수전해 장치의 성능도 높아졌다.
그 결과 지난 20년간 고체산화물 연료전지의
발전 효율은 40%대에서 60% 안팎까지 올라섰다. 이는 현재 상용 발전 기술 중 최고 수준으로, 대형 발전소뿐 아니라
분산형 전원, 해상·수송용 전력원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오늘날 유럽과 미국에서는 수십 MW급 고온 연료전지와 수전해 실증
플랜트가 운영 중이며, 국내에서도 '한국형 고온수전해' 기술 확보를 위해 정부와 기업, 연구기관이 힘을 모으고 있다.
과학사적으로 네른스트의 실험은 '우연이 세상을
바꾼'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그 우연을 현실의 기술로
이어준 것은 한 세기 넘게 이어진 재료과학의 끈질긴 연구였다. 고온에서 전기를 통하게 하는 단일한 특성이
세라믹 가공, 촉매 개발, 열 관리 기술과 결합하며, 오늘날 탄소중립 시대의 핵심 에너지 해법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지르코니아를 비롯한 세라믹 전해질 연구는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더 높은 이온전도도, 더 긴 수명,
더 낮은 제조비용을 향한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탄소중립과 에너지 안보를 함께
달성하려면, 눈에 보이는 장치만큼이나 그 속을 지탱하는 재료과학의 혁신이 필수다. 100여 년 전 실험실에서 켜진 작은 전구 불빛이 오늘날 수소경제의 가능성을 밝혔듯, 우리의 과제는 그 불빛을 더 크고 오래 켜는 일이다. 미래의 연료전지와
수전해 장치 속에서도, 네른스트가 사랑했던 지르코니아는 여전히 조용히 핵심 역할을 할 것이다. 최윤석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선임연구원
*기사링크 : [생활속
과학이야기] 빛 찾다 발견한
수소에너지의 미래
< 생활속 과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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