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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기획기사

[시론] 소재의 추억 - 곽병성 원장

  • 작성일 201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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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성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장
최고난도 소재 개발 이루려면 지도자 과감한 결단·안목 필수
연구진은 사즉생 각오 도전해야 인재 투자·기계장비산업 육성도
[서울경제] 7월1일 일본이 전자산업 핵심소재 3종에 관한 수출제한 조치를 내놓았을 때 갑자기 19세기 대표 미국 민요 ‘매기의 추억’이 떠올랐다. 아름다웠던 옛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현재의 안타까움이 노래에 녹아있듯이 필자에게도 2000년대 초 정보전자 소재를 개발했던 추억과 동고동락했지만 병으로 세상을 먼저 떠난 동료, 열정과 도전정신으로 연구개발에 헌신했던 후배들 그리고 아직도 일본 의존도가 높은 소재산업에 대한 아쉬움이 뒤엉켰기 때문이리라.

2003년 대기업 임원이었던 필자는 정보전자 소재산업 진출을 위해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수백종의 소재 중 사업적·기술적 타당성이 높은 품목 중심으로 리스트를 만들었고 다방면의 조사와 시장 전망에 대한 분석을 검토해 기술개발 가능성을 제시한 계획서로 연구개발에 착수하게 됐다. 개발 과정 중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첫 번째 시작한 과제는 몇년 후 상업적으로 성공했고 후속으로 기획했던 제품들도 상업화에 성공했다. 관련 사업들은 자회사로 독립했고 수조원의 기업 가치로 평가받고 세계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얻었던 교훈이 있었다. 첫째는 지도자의 혜안과 의지다. 처음 계획서를 작성해 태스크포스를 같이 운영하던 사업에 타당성 검토와 실증설비에 대한 투자를 요청했지만 갑자기 사업성이 없다는 태도에 포기할까 망설이다 용기를 내 최고경영자(CEO)에게 직접 보고했다. CEO는 회사의 다른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분으로 이 사업의 가치를 꿰뚫어보고 지원을 지시했다. 소재산업은 대규모 자본의 지속적 투입과 공급망에 진입하려는 글로벌 경쟁이 치열한 산업으로 지도자의 과감한 결단과 예리한 안목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둘째는 도전정신이다. 사내에 관련 인력이 부족해 그 당시 불과 5명 내외였던 연구팀은 사즉생의 각오로 도전하지 않으면 뒤따를 과제에도 악영향을 주게 되니 반드시 성공해 회사의 체질을 개선하자고 다짐했다. 후에 연구진을 보강했지만 이들이 앞장서 외국어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기술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등 불철주야 연구에 매진해 모든 장벽을 극복했고 마침내 상업화에 성공했다.

셋째는 전방산업에 대한 바른 이해와 소비자 요구에 맞는 사업이다. 이 과제는 기존 수행방식과 전혀 다른 ‘병렬엔지니어링기법’ 즉, 제품 개발 시 실험실연구 후 실증연구를 하고 실증연구 후 공장을 짓는 방식이 아닌 실험실연구와 실증연구를 거의 동시에 하며 실증연구와 공장 건설을 중첩했다. 이는 제품수명이 짧아 빠르게 후속제품을 출시해야 하는 전자산업의 특성을 최대한 반영한 것이다. 다만 한 단계라도 실패하거나 계획대로 실행되지 않으면 그에 따른 리스크가 커서 쉽지 않은 전략이지만 소재산업 영위를 위해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넷째는 인재에 과감히 투자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소재산업은 대체로 상세한 규격이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또한 공급처는 적고 오랜 기간 전후방 기술을 개발해온 과점 글로벌 기업으로 인해 인재유치도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내부인재를 잘 선발하고 동시에 외부의 유사분야 인재를 채용해 키워야 한다. 이 과정에서 수요기업이 소재기업과 긴밀히 협력하고 도와주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다섯째 기계·장비산업을 육성해야 한다. 첨단소재 개발을 위해서는 최신 연구시설과 상업화 연구에 필요한 고가의 실증장비 투자가 필수다. 우리나라는 관련 산업의 뿌리가 약해 꼼꼼히 장기계획을 수립하고 산업을 체계적으로 육성해야 한다.

소재산업은 높은 기술력과 거대 자본이 투입돼야 하는 최고난도의 산업이므로 하루아침에 산업의 경쟁력 제고를 기대할 수 없다. 이번과 같은 큰 위기를 기회 삼아 국가적으로 역량을 결집하고 산학연이 힘을 합해 장기적으로 차분하게 대응한다면 우리의 소재산업도 진정한 광복을 맞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원문 링크 : https://www.sedaily.com/NewsView/1VN0O3K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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